|
|
|
|
|
 |
|
산추련 |
|
 |
|
[75호]“저는 그저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
|
몇 십년 만에 찾아온 매서운 추위로 따뜻한 아랫목에 파묻혀 있고만 싶은 아침, 바람이 칼끝처럼 매섭다는 영도의 85호 크레인 앞을 찾았다. 아찔한 크레인 위 그곳에서도 내 여민 옷 속을 파고드는 무심한 바람이 스치고 있겠지. 이번호에서 소개하고 싶은 분은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동지 이다. 한국최초 여자 용접공으로, 한진중공업의 해고자로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부터 지금까지 복직의 꿈을 버리지 않은, 현재는 동지들의 정리해고를 막고자 저 높은 곳에 오른.. 그런데 막상 내가 소개할 김진숙동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구나 싶다.
김진숙 동지가 올라있는 85호 크레인 앞에는 오늘 열릴 문화제 준비에 한창이었다. 한쪽에선 기타반주에 노랫소리가 들리고 한곳에선 풍물연습이 한창이다. 영도의 시린 바람에 맞설 따뜻한 먹거리도 준비되는 모습을 보니 투쟁의 현장에선 항상 사람냄새가 난다. 이런 온기가 없었다면 지리한 투쟁 속 어디에다 마음을 붙일까 싶다.
크레인 아래에 자리를 잡은 동지들 속에서 민주노총부산지역본부 황이라 상담부장께 김진숙 동지의 근황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김진숙 동지의 건강은 어떠신가요?
“작년 단식이후 아직 건강이 회복 되지 못한 상태라 밥을 잘 못드세요,, 조금씩 다른 것으로 드시고 계시고, 그래도 다행이 건강은 아직 괜찮으신것 같아요. 저희는 건강과 함께 심리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요즘 갱신을 거듭하는 영하의 날씨에 꽂혀서일까? 추워서 어떻게 하시냐는 뻔~~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추위야... 뭐.. 당연히 추우시겠지요..
원래 성격이 말을 많이 하시는 성격이 아니시라.. 그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으세요..
제가 작년 3월부터 지도위원님과 함께 살게 되었어요. 처음 오르실 때 편지글 보시면 알겠지만 오르시기 전 처음으로 보일러를 트셨어요. (2003년 한진중공업의 구조조정 및 손배가압류 중단을 위해 당시 노조 지회장이던 故(고) 김주익 전 지회장이 129일 동안 고공농성을 하다 스스로 목을 매었고, 곽재규 조합원도 85호 크레인에서 투신하였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2003년 이후 죄스러운 마음으로 지금까지 보일러를 단 한번도 켜지 못했다고 한다.)
그날, 우리 보일러 켜고 따뜻하게 한번 자보자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그 집에 이사하시고 처음으로 보일러를 돌리다 보니 바닥에서 뻥뻥 가스 터지는 소리가 났어요. 놀라서 경비실에 전화를 했더니 경비실에서도 그동안 한 번도 보일러를 틀지 않았냐며 놀라시더라구요..“
주익씨가 앉고 눕고 섰던 이 자리에 와서야
어떤 날 웃었고
어떤 날 울었고
어떤 날 되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절망했는지도 알겠습니다.
129일동안 되풀이되던 절망가운데서도
어쩌다 오는 희망을 붙잡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쳤는지도 이제 알겠습니다.
깊은 상처는 세월이 흐른다고 아무는게 아니라
그 상처에 새살이 돋아야 비로소 아문다는 것도 이제 알겠습니다.
지난 일요일. 2003년 이후 처음으로 보일러를 켰습니다.
양말을 신고도 발이 시려웠는데 바닥이 참 따뜻했습니다.
따뜻한 방바닥을 두고 나서는 일도 이리 막막하고 아까운데
주익씨는... 재규형은 얼마나 밟히는 것도 많고 아까운 것도 많았을까요.
목이 메이게 부르고 또 불러보는 조합원 동지 여러분!
-김진숙 둥지 편지글 중-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문화제가 열릴 시간에 가까웠다. 부산 동지들의 연대의 자리에 함께 자리를 잡고 노래를 따라 부르다보니 크레인 위에서 함께 하고 있는 김진숙 동지가 보인다. 좀 더 가까이 안색이라도 살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무색하게 김진숙 동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문화제가 끝난 후 잠시 김진숙 동지와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본인의 건강이 가장 걱정이 되었다.
건강은 어떠 신가요?
“건강이란게 달리 뭐 나쁜건 없습니다. 다만 작년 단식이후 밥을 잘 먹지 못하는 것이 있지만 밥 이외에 다른걸로 잘 먹고 있습니다.”
한진 조합원과 다른 지역의 동지들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버티는게 이기는 싸움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구요.
자본이 시험에 들게 하는 상황에 있죠. 가족과도 싸우게 만들고 무노동 무임금을 적용해서 생계비 문제도 생기고 현제 한진 조합원들도 작년부터 임금을 제대로 못 받으면서 힘들겁니다. 요즘 노동자를 억압하는 방식이 이런 방식으로 가고 있어요. 저는 버티는게 이기는 싸움이고 최선이다 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요즘 구조조정이 일상이 되다보니 분노가 없는게 문제입니다. 구조조정의 문제를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뎌져 가는 아마 한진의 동지들도 이전에 쌍차나 대림차 구조조정문제를 자기일로 받아들이지 못했겠지요.. 저는 그저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1월 3일 아침, 침낭도 아니고 이불을 들고 출근하시는 아저씨를 봤습니다.
새해 첫 출근 날 노숙농성을 해야 하는 아저씨의 마음은 어땠을 까요.
이 겨울 시청광장 찬바닥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가장에게 이불보따리를 사줬던 마누라는 어떤 마음 이었을까요.
살고 싶은 겁니다. 다들 어떻게든 버텨서 살아남고 싶은 겁니다.
지난(해) 2월 26일, 구조조정을 중단하기로 합의한 이후 한진에선 3천명이 넘는 노동자가 잘렸고, 설계실이 폐쇄됐고, 울산공장이 폐쇄됐고, 다대포도 곧 그럴 것이고, 300명이 넘는 노동자가 강제휴직 당했습니다.
명퇴압박에 시달리던 박범수, 손규열 두 분이 같은 사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또 400명을 짜르겠답니다. 하청까지 천명이 넘게 짤리겠지요. 흑자기업 한진중공업에서 채 1년도 안된 시간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그저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라는 말이 귓속에서 자꾸 맴돈다. 분노할 때 분노하줄 아는 사람, 동지의 문제를 자기의 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옳지 않는 일엔 끝까지 아니라고 버틸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김진숙 동지가 아닐까 싶다.
여기 또 한 마리의 파리목숨이 불나방처럼 크레인 위로 기어오릅니다.
스물한살에 입사한 이후 한진과 참 질긴 악연을 이어왔습니다.
스물한살에 입사한 이후 한진과 참 질긴 악연을 이어왔습니다.
스물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수배생활 5년 하고, 부산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가고
쉰 두 살이 됐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생각했는데 가장 큰 고비가 남았네요.
평범치 못한 삶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만
이번 결단을 앞두고 가장 많이 번민 했습니다. 85호 크레인의 의미를 알기에..
지난 1년, 앉아도 바늘방석이었고 누워도 가시이불이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 앉아야 했던 불면의 밤들.
이렇게 조합원들 짤려나가는 거 눈뜨고 볼 수만은 없는 거 아닙니까.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정면으로 붙어야 하는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한진조합원들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걸 다해서 우리 조합원들 지킬 겁니다.
- 김진숙 동지의 편지글 중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