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R지회 노동자의 직장폐쇄 후 심리사회적 적응실태 조사
및 심리정신건강 보호를 위한 프로그램 결과
인간人間이라는 말에 사이 간(間=inter, between)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본성에는 인간관계가 이미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역경을 극복하는 사람들 주변에는
한결같이 사랑과 신뢰를 보내주는 든든한 지원자가 있다.
사람은 혼자서는 강할 수가 없다. 외로운 사람은 쉽게 나약해진다.
주변 사람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고
훈훈한 지원을 주고받는 사람일수록 내면이 강인하다.
- 회복탄력성(김주환 저)
노동자의 정당한 쟁의 행위에 대해서 KBR 사측은 2014년 5월 폐업을 공고하였다. 기계반출 중단과 공장 정상화를 요구하며 장기투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회사의 협박성 가정통신문, 2012년부터 지속된 조합원에 대한 손배가압류, 생활고 등으로 조합원 가족이 자결하는 비극까지 발생하였다. 금속노조 경남지부 노동자들은 일인당 일정 금액을 투쟁기금으로 거출하여 연대지원하는 대책을 세워 추진하였고, 금속노조의 지원으로 KBR지회 노동자들의 장기투쟁 1년 9개월이 지나는 시점에서 KBR지회 노동자의 심리사회적 적응실태 조사 및 심리정신건강 보호를 위한 프로그램을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설명회, 설문조사, 집단프로그램, 심층면담으로 구성되어 진행되고 있던 중, 2016년 2월 29일 회사와 공장정상화 합의 이후 조합원들이 투쟁 660일만에 현장으로 복귀하면서 6회기 중 5회기의 집단프로그램과 37명중 20명의 조합원의 심층면담까지만 진행되었고 다음과 같은 결과를 보고하게 되었다.
■ 설명회 및 설문 조사
KBR지회 조합원 35명을 대상으로 일반문항 및 기타, 소득 실태, 사회기관에 대한 신뢰도, 수면의 질, 우울, 불안, 전반적 정신건강, 사회심리적 스트레스 수준, 지각된 사회적지지 척도, 회복탄력성을 내용으로 설문 조사하였다. 직장폐쇄 후 장기투쟁 1년 9개월이 지나는 시점에서의 KBR지회 노동자들의 삶, 신체, 마음건강은 여러 영역에서 어려움을 보이고 있었다.
KBR지회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빚을 냈으며,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서 1순위가 ‘경제적 고통’, 2순위로 ‘불투명한 미래’를 꼽고 있었다. 직장폐쇄 후 78.2%가 흡연량이 늘었고, 79.3%는 음주량이 늘었으며, 88.6%는 규칙적인 운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수면의 질이 나빴으며, 소화장애가 있고, 식사를 거르거나 불규칙해지고 인스턴트를 먹게되는 등 식습관도 나빠졌다. 22.9% 노동자에게서 우울감은 상담이 필요한 수준으로 심각하였으며, 전반적인 정신건강 문제를 평가하는 척도에서는 11.4% 노동자가 대인관계예민성, 적대감, 우울, 불안 영역 등에서 조절하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심리적 스트레스를 평가하는 척도에서는 37.1%가 위험성이 높은 스트레스 수준을 보였다.
역경과 어려움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극복하는 힘인 회복탄력성 총점은 91.4%가 ‘향상되기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거나 낮은 편으로 나타났다. 정부, 지자체, 고용노동부, 지역구 정치인에 대한 사회기관 신뢰도는 100점 만점에 25점 이하로 낮은 평가를 하였지만, 주변으로부터 받고있다고 느끼는 사회적 지지감(정서, 물질, 정보, 평가)은 높은 편이다. 51.4%가 보통의 수준으로 느끼고 있으며, 28.6%는 대부분 지지받는다고 느끼고 있고, 지지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응답자는 20%로 나타났다.
■ 집단 프로그램
회복탄력성 증진을 위해 공감대 형성 및 자기 노출 / 감정에 대한 이해 및 인식 / 자신의 상황 지각 및 생각 탐색 훈련 / 자기 진단 및 강점 찾기 / 정서 조절 및 의사소통 훈련 / 연습이 필요한 행복하기 로 6회기를 구성하여 진행하였다. 집단 프로그램의 첫회기에서는 ‘이런 심리치유 프로그램을 실시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왜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고들 하였으며, 자기노출이나 자기표현을 많이 억제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도 힘든 시간들이 지속되고 있는데, 굳이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서 서로의 힘든 마음을 부추기고 부정적 감정을 촉발시키면 안된다, 말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을 주로 표현하였다. 회기가 진행될수록 ‘여전히 왜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웃을 일이 없었는데, 이 시간이라도 웃을 수 있어서 좋다’, ‘그래도 동료들의 마음을 조금 알수 있게 되어서 반가웠다.’는 마음들을 드러내었다.
■ 심층 면담
설문지나 집단 프로그램 상황에서 드러낼 수 없었던 개별 심리적 어려움을 비교적 안전하게 드러낼 수 있고, 면담자는 각 조합원 개인의 심리정신건강 어려움에 대해 더 면밀히 탐색·평가하고, 위험성을 발견할 수 있는 장이 되며, 이후 개인별 대처 계획을 함께 세울 수 있다. 그리고, 개별 설문지의 심리검사 결과 설명이 가능하였다. 심층면담을 통해 나타난 마음들은 힘들고, 좌절하고,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분노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스스로 피해자로만 남겨두지는 않았다. 이전에는 야근한다고 가족을 볼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 감사하게 되고, 일하러 간 아내가 늦게 돌아오기에 이전에 하지 않던 가사노동과 자녀 돌보기를 하고 있었으며, 잠든 아들의 작은 발을 만지며 감동한다고도 하였다. 투쟁 초반에는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마셨던 술로 인해 싸움으로 번지는 일들이 생기기도 하였지만 긴 싸움을 하기 위해 서로 자정하고, 조절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들 하나같이 ‘끝까지 가야죠’ 주문처럼 말하였다. 전체모임에서 구호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끼리 삼삼오오 모이면 그렇게 이야기하게 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버티게 한 힘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에서는, 이종철 회장에 대한 분노로 아내마저도 지지하였고, 싸움을 그만두면 더 힘든 삶의 조건이 기다리고 있고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에 싸울 수밖에 없었음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며, 친구들의 도움과 지지, 위로도 힘이 된다고들 하였다. 그리고, 함께 하는 동료들, 금속노조를 포함한 외부의 지원에 감사한 마음을 말로 드러내면서, 이전에는 조합간부들이 지회에 써야할 신경을 바깥에 쓴다고 싫은 소리를 하기도 했었는데 연대를 받아보니 이젠 알겠다고 했다. 지회 밖 활동에 대한 마음이 이젠 다르다고 했다.
역경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곁을 지켜주는 든든한 마음의 후원자가 있을 때, 개인과 집단은 강한 회복탄력성을 갖게 된다. 설문지 수치에서 미처 다 드러나지 않았던, 얼굴 맞댄 대화에서 알게 된 KBR 지회 노동자들의 마음의 힘은 함께 하는 관계들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던져진다고 쉽게 깨지는 유리공이 아니었다. 화내고, 괴로워하고, 눈물 흘리는 가운데서도 관계를 감사해하며 소중한 일상의 삶을 지켜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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