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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 이제 소주한잔 따라 놓고 넋두리 할 수 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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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소주한잔 따라 놓고 넋두리 할 수 있구나
-이영일, 림종호 열사 추모비 제막을 마치고-
이호성 사무장(S&T 중공업 지회)
1990년 5월 3일 목요일, 당시 나는 수배 중이었다. 마산 양덕동에 방을 하나 구해 있던 중 점심을 먹기 위해 라면을 끓이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12시 정오뉴스에서 이영일 열사의 분신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즉시 다른 수배 동지의 집으로 갔고 곧 수배 동지들이 모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책을 논의하고 수배자 일동 이름으로 선전물을 제작하였다.
1993년 3월 초, 석방 후 교선부장이 된 나는 교선실 짐을 정리하다 문서보관함에 보관된 이영일 열사의 노트와 안전화, 까만 비닐봉지에 담겨진 불에 타 눌러붙은 작업복이 있었다. 이영일 열사의 채취가 고스란히 담긴 노트와 분신당시 입었던 작업복. 나는 살짝만 눌러도 바스러질 것 같은 작업복을 하얀 전지로 포장하여 보관 하였다.
1994년 9월 18일 일요일, 추석연휴 기간이 시작되고 차례를 창원에서 지내는 나는 특근을 하던 중 퇴근시간 무렵 한 동지가 나에게 뛰어오며 림종호 동지 가족이 정문에 와있으니 가보란다. 불안했다. 며칠 전 진주교도소에서 림종호 동지를 만났을 때 변호사 접견을 요청하여 추석 연휴가 끝나고 접견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불안한 마음이 요동친다.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을 가지고 정문에 가니 림종호 동지의 가족들이 와있었고 설마는 사실이 되었다. 퇴근하는 즉시 다른 동지와 함께 진주시 의료원에 갔다.
며칠 후 진주교도소에서 림종호 열사가 기거했던 독방을 공개했다. 가족과 함께 찾아간 1.07평의 독방. 림종호 동지가 마지막으로 먹었을 빈 컵라면과 함께 저물어가는 햇살은 창살사이로 들어와 동지의 한이 맺힌 하얀벽을 차갑고 길게 비추고 있었다.
2004년 3월 어느 날, 지회 사무실에 걸려 있는 이영일, 림종호 열사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림종호 열사의 여자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림종호 열사 장례식을 마친 며칠 후 다방에서 만난 여자 친구는 림종호 동지의 추모비를 꼭 회사 내에 세워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림종호 열사의 여자 친구는 슬픔을 간직한 채 창원을 떠났다.
이영일 열사가 산화한지 14년, 림종호 열사가 외로운 독방에서 산화한지 10년, 점차 우리의 기억 속에 사라져 가는지 해마다 실시하던 5.3 추모제는 점차 형식화 되어가고 있었다.
이러다간 열사들의 정신마저 우리는 망각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지회장에게 열사 추모비를 만들어 사내에 세우는 것을 제안하였다. 지회장도 흔쾌히 동의를 하여 추모비 제작에 들어 갔다. 동지들과 의견을 나누어 추모비 도면을 그려 추모비 제작을 하고 트럭에 실어 지회 앞에 가져왔다.
역시나 회사는 당장 뛰어나와 추모비를 사내에 세울 수 없다며 트럭에서 추모비를 내리는 것을 방해하였다. 할 수 없이 추모비는 연덕공장에 보관하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 추모비는 5년동안 공장을 옮겨 대원동 공장 한켠에 먼지를 뒤집어쓰며 보관 아닌 방치되어 가고 있었다.
방치된 추모비는 우리에게 마음의 부담이었고, 열사들에 대한 죄였다.
2007년 초, 추모비를 어느 곳에 세우더라도 이영일, 림종호 열사 추모사업회를 만들어 조합원의 힘으로 추모비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추모사업회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지회 중심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현장중심으로 할 것인가의 이견차이로 추모사업회는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하였다.
2007년 11월, 정기대의원 대회에서 지회 대의원들은 더 이상 추모비를 방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오는 5월 추모일에 맞춰 추모비를 세울 것을 결의하였다.
2009년 4월, 추모비 건립 소식을 알리기 위해 림종호 열사의 고향인 합천을 방문하였다. 앓고 계신 아버님과 하루도 자식을 잊지 못하고 계신 어머님은 “종호가 죽고 2~3년 지나면 회사 사람들도 종호를 잊을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잊지 않고 추모비까지 세운다고 하니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며 추모비 제막식에 꼭 참석하시겠다고 약속 하셨다.
이영일 열사의 동생 전화번호를 수소문을 통해 알아 전화하였다. 추모비를 세운다는 갑작스런 연락에 어리둥절한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제막식에 참석하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2009년 4월22일, 드디어 추모비가 5년 만에 바깥세상을 구경하게 되었다. 지부에서 빌린 1톤 트럭에 실려 추모비는 양산 솥발산 묘역으로 출발하였다. 5년 동안 쌓인 먼지가 무거웠나 보다. 트럭이 헉헉된다. 묘역에 도착하여 추모비 박스를 내리고 나무박스를 뜯으니 지난 5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추모비가 햇빛을 가득 머금는다.
2009년 5월 3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걱정을 많이 했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고 도리어 구름 낀 날씨에 덥지 않고 제막식을 하기에는 적당한 날씨였다. 이제 열사들을 조금 볼 면목이라도 선 것일까? 영정 속의 열사들이 나를 보고 은근히 미소 짓는 것 같다. 그러나 식을 진행하면서 다시 쳐다보니 슬픔어린 눈길로 나를 보고 있다. 점차 나약해져 가고 있는 나를 쳐다보는 동지의 애정 어린 눈길일까? 아님 S&T자본에 짓밟히고 있는 우리 조합원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길일까? 열사들이 죽어가면서 그렇게도 외친 노동해방의 발걸음이 주춤해지고 있는데 대한 안타까움과 슬픈 감정의 눈길일까?
추모식 전날, 이영일 열사의 친구가 창원에 내려와 같이 소주한잔 하였다. 친구는 “이제라도 영일이에게 소주한잔 따라줄 수 있고, 친구들이 모여 영일이를 볼 수 있게 되어 정말 좋다”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렇구나. 우리도 그동안 이영일, 림종호 열사에게 술 한잔 따라줄 수 없었는데 이젠 힘들거나 지치면 여기 와서 소주한잔 따라놓고 함께 넋두리를 풀 수 있겠구나.’
이제 열사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열사들을 우리 가슴에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추모비 건립을 계기로 작년에 중단된 “추모사업회”를 만드는 일이다. 이영일, 림종호 열사를 중심으로 추모사업회 속에서 동지들이 혹 회사를 떠난다 할지라도 열사들의 정신을 잊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정신이자 힘이 되고, 열사들이 염원하고 외쳤던 “노동해방”을 향한 발걸음을 계속 이어 나갈 것이다.
이번 추모비 건립은 조합원 동지들의 힘으로 성사되었다. 회사가 경비를 일체 부담하겠다는 회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오직 조합원 동지들의 힘으로 추모비를 건립하여야 한다는 설명에 조합원 동지들은 아낌없이 성금모금에 적극 참여하여 추모비 건립비용을 마련하여 큰 어려움 없이 추모비제막식을 치르게 된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추모비 건립을 위한 성금 모금에 적극 참여하여 주신 조합원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마지막으로 추모비 제막식에 참석하여 주신 열사 가족 및 조합원, 간부 그리고 지역 동지들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제 힘들고 지칠 때 이영일 열사와 림종호 열사와 소주한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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