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할 때 존중받을 수 있다.
내 권리를 소중하게 생각할 때 지킬 수 있다.
최지명 산추련 전 상근활동가
아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청년시절의 나에게 ‘지맹’ 아니면 ‘지멍’이라고 불렀다. 야무질 듯하게 생긴 아이가 하도 어리버리 하고, 잘 잊어버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함께 자리 지키고 버티는 것도 하겠고, 상담하러 오신 분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도 속타는 심정이 이해되면서 답답함 없이 여러 번이라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처리해야 할 일이 눈앞에 닥치면, 나는 갈피를 못 잡고 머릿속이 하얘지기만 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생길 갈등과 싸움이 우선 겁났고, 일이 잘못될까 미리 두려워, 일의 방향과 우선순위를 결정하기가 너무 어렵게 느껴졌던 것이다.
산추련으로 상담하러 온 그 한 사람의 문제는 ‘한’ 건이 아니라 다른 노동자, 다른 사업장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문제점이었기 때문에, 그 한 사례의 결과가 파급효과를 가진다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매사에 겁을 먹었었다.
법과 제도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한편 문제점이 반복되면 피해 입는 사람이 더 이상 재발하지 않도록 변화시켜야 할 것이 법과 제도이다. 그러나 법과 제도의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기존의 법과 제도로 이익을 누리던 소수 집단이 가지고 있는 힘의 이미지에 눌려 약자들이 미리 포기하거나, 몇몇이 반대 뜻의 목소리를 낼라치면 중간에서 처리하는 사람들이 눈치껏 알아서 기고 막아주면, 세상은 조용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반대 목소리가 커지면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강자들은 자기들만의 불편함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반대 목소리를 제거하고 파괴하려는 목적으로만 행동하니까 변화와 탄생은 갈등을 거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때의 나는 머리로는 그걸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닥친 일에서는 근로복지공단에 가서 해당 담당자와 큰소리와 싸움을 피하고 조곤조곤 말로 풀어내려하니 해결될 리가 있나, 담당자가 기존의 법과 제도로 안된다하면, 담당자 선에서 고만 땡인데, 뭐.
우리사회에는 자신이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았어도 상대방의 아픔을 공감하고 미리 배려하는 이도 있지만, 대개는 자기가 경험하지 않고 불편하지 않은 일은 깊이 생각하지 않게 되고, 자신에게 소중하거나 자신보다 강한 대상일 때라야 미리 살펴서 심기 불편함이 없도록 행동하게 되는 법이다.
‘한쪽에만 편한 그 법과 제도가 잘못된 것이니, 바꾸자’는 우리 뜻을 지금껏 편하게 지내오던 상대방이 알게 하려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거나, 우리가 상대에게 미리 신경써야 할 정도의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문제든 일상의 대인관계, 가족관계든 마찬가지인 것 같다. 스스로 모자란 약자라고 생각하면, 상대방의 무례임에도 내가 나의 부족함과 실수에 위축되어 먼저 포기하게 되지만, 나 역시 소중한 존재라는 걸 느끼게 되면, 상대방에게 화내지 않고도 당당히 드러내어 주장하게 되고, 그 분위기를 느낀 상대방이 오히려 나에게 먼저 함부로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산추련 활동을 통해 경험한 것들을, 이제 40대가 되어서야 체감을 하고 나의 일상에서 적용되는 것 같다.
지금은 직장에서의 공공의 적도 나는 안 건드리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산다. 하하. 누군가 나를 건드려도 내 주장과 상대방의 주장을 조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좀 생긴 모양이다. 나의 부족함과 실수에 대해서도 이제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넉살좋게 드러내고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졌다.
부정한 방향이 아니었던 이상, 수정하면서 함께 하는 사람들과 더 의미 있는 대화를 하거나 사이가 더 신뢰가 돈독해진다는 성공경험들이 쌓였기 때문인 것 같다.
요즈음 뉴스들을 보면서, 정치하는 이들이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을 의식하면서 느끼는 압력이 표를 받아야하는 시기에만 느끼는 압력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의 상식이 될 수 있도록 우리도 변하는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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