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산추련)


		산추련

		[80호]노동자 정치세력화,실패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나

이김춘택

비례대표선거 부정투표로 촉발된 통합진보당 사태는 그동안 추진되어온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한 시기가 실패로 끝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민주노총은 ‘조건부 지지철회’라는 결정으로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통합진보당이 노동자들이 지지해야 할 정당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런 의미에서, 언론에 오르내리는 이석기, 김재연 두 의원의 제명 여부나 강병기와 강기갑 둘 중 누가 당대표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노동자들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를 상징하는 통합진보당 사태
통합진보당의 탄생은 그 자체로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새로운 갈림길에 서 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이제까지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자본가계급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역사였다. 그래서 누구는 (자본가 정당만 존재하는) “판을 갈아엎어야 한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구는 “자본가 정당들 사이에 샛강이 흐른다면,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장강이 흐른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이번 총선을 앞두고 아예 민주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들은 한국사회에서 진보정당의 독자생존은 불가능하다며 미국식 양당구조 속에서 민주당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노무현정신을 계승한다는 신자유주의 세력과 손잡고 통합진보당을 만들었다. 이들 역시 독자 생존으로는 영원히 한 줌의 세력으로 남을 뿐이므로 신자유주의세력과 손을 잡아서라도 영향력 있는 정치세력(원내교섭단체)이 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들은 모두 ‘현실’을 핑계로 과거 자신이 걸어온 길을 부정하고 다른 길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통합진보당이 지금처럼 아수라장이 되지 않았더라도, 우리 앞에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새롭게 시작해야 할 과제가 놓여 있었다. 다만 통합진보당 사태는 그것을 좀더 ‘드라마틱하게’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실패한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들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오산이다. 우리 앞에는 엄연히 실패한 과거의 역사가 놓여 있다. 그러므로 그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한다면,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새롭게 시작할 수도 없고 한 발짝 앞으로 나갈 수도 없을 것이다.

의회주의 극복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의회주의’ 극복이다. 진보정당이 국회에 들어가게 된 이후 진보정당의 모든 활동은 ‘국회의원 만들기’에 집중되었다. “노동자 국회의원 한 명만 있었더라면...” 하는 처음의 바람은 소박한 것이었으나, 나중엔 마치 국회의원 20명 없이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선거판에 조합원들을 열심히 동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번 총선에서 이른바 ‘노동자 정치 1번지’라는 경남에서 벌어진 일들은 의회주의의 타락(?)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오직 당선을 위해 같은 ‘강씨 문중’의 여권 후보와 과감하게 단일화하려다 석패하자 불복하고 나섰던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지역정서에 영합해 ‘창원시청 사수!’를 전면에 내걸고 삼보일배까지 한 사람들도 있었다. 참으로 낯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같은 일은 후보개인의 문제가 아닌 의회주의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즉 의회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새롭게 시작한들 똑같은 모습이 반복될 것이다.

‘돈 내는 당원’이 아닌 ‘활동하는 당원’의 현장정치
의회주의를 극복하려면 현장정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까지 진보정당은 보수정당과 비교하며 ‘진성당원제’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왔다. 또한 당권을 장악하고 온갖 패권을 휘두르던 세력일수록 자신들의 주장 앞에 ‘진성당원’이란 말을 앞세웠다.
그런데 진성당원이란 달리 말하면 ‘돈(만) 내는 당원’이다. 물론 ‘돈(만) 내는 당원’ 수만 명이 서류로만 존재하는 보수정당의 수십 만 당원보다 나을 수는 있다. 그러나 활동은 하지 않고 ‘돈(만) 내는 당원’의 존재야 말로 역설적으로 당내 패권주의의 기반이었고, 유령당원, 조직선거, 대리투표 등 부정선거의 바탕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만) 내는 당원’이 아니라 ‘활동하는 당원’이다. 진보정당의 지향과 내용을 가지고 자신의 현장에서 그리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당원들로 구성된 정당만이 아래로부터 만들어지는 현장정치의 힘으로 의회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또한 활동하는 당원으로 구성된 정당의 현장정치가 활발히 이루어질 때 노동조합 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은 서로를 상승시키고 발전시키는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 대안사회를 지향하는 정당
신자유주의 세력과 손잡은 통합진보당의 탄생은 진보정당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그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우리에게 되묻게 한다. 그리고 현재의 ‘통합진보당 사태’는 이 같은 질문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한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정당은 ‘자본주의 극복’을 명확한 자기 지향과 내용으로 갖는 정당이어야 한다. 그것은 ‘사회주의’를 명확히 내 건 것일 수도 있고, ‘반자본주의’로 표현된 것일 수도 있으며, 좀 더 막연하게 ‘새로운 사회’나 ‘대안사회’로 표현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스와 유럽의 상황이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현재 우리가 세계 대공황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생각하면 진보정당이 ‘자본주의 극복’을 명확히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극복’이 당의 강령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원들이 현실에서 자본주의 극복 방안과 대안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하는 정당이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의회주의에 빠진 것, 신자유주의 세력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만들고 묻지마 야권단일화에 매진하게 된 것과 강령에 추상적으로나마 존재하던 ‘사회주의 계승’ 문구를 삭제하게 된 것은 동떨어진 문제가 결코 아니다.

사실, 현장 노동자들과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냉소가 지배적이다. 이것도 저것도 꼴 보기 싫으니 다 집어치우라고 한다. 그러나 노동현장을 떠나지 않는 한 노동조합운동을 포기할 수 없듯이, 노동조합운동을 포기하지 않는 한 노동자 정치세력화 역시 그만 둘 수 없다.
우리는 통합진보당 사태로 확인 된 노동자 정치세력화 실패의 역사를 딛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당원들의 현장정치를 통해, 의회주의를 극복하고,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사회를 목표로 삼는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부터 고민하고 토론하고 행동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