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호]새로운 길 위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

[영화로세상일기]
작성자
mklabor
작성일
2025-10-27 14:59
조회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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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제희 여성학연구활동가



- 내 말 좀 들어줘(원제: Hard truths) (감독 마이크 리, 2024)

한국어 제목 ‘내 말 좀 들어줘’는 적절한 선택일까. 포스터에 실린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버거워”라는 문구가 호기심을 부르는 제목과 연결돼 주인공의 내면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원제 ‘Hard Truths’는 사전적으로 ‘불편한 진실’을 뜻한다. 쉽게 말할 수 없는 마음, 말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진실을 드러낼 때 상황이 오히려 더 나빠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혼자는 힘들지만 함께하는 이들이 나를 구속한다면 차라리 혼자가 낫다고 체념하는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중년 흑인 여성 팬지는 배관 노동자인 남편, 청년 아들과 함께 산다. 팬지는 안전과 위생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편집성 불안’이 있다. 가족뿐만 아니라 만나는 이들 모두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반면 두 딸과 사는 여동생은 밝고 유머러스해 자녀들과도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다. 긴장은 ‘어머니의 날’에 자매가 어머니 묘소에 다녀온 뒤, 팬지 가족이 동생네 집을 찾아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팬지가 느닷없이 오열하며 고조된다.

다음 날, 남편이 허리를 다쳐 동료와 함께 귀가하면서 상황이 극단에 놓인다. 동료가 남편을 부축해 집에 데려다주고 팬지를 찾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가자, 잠자던 팬지는 강도와 맞닥뜨린 듯 비명을 지르며 겁에 질린다. 남편은 통증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앉아 있고, 팬지는 침실에서 이불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쉰다. 각자 아래위 층에서 붙박이처럼 멈춰 있는 두 사람을 두고 동료는 황급히 자리를 떠나며,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난다. 이들은 어떻게 될까, 팬지는 어떤 선택을 할까.

사회심리학자이자 여성주의자인 베티 프리단은 「여성의 신비」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라는 표현을 썼다. 1950년대 미국 여성들이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과 자신이 원하는 삶 사이에서 느끼는 좌절과 고통을 가리킨다. 여성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여성성’이라는 신비로 이데올로기화해 억눌렀음을 지적한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여성들의 출산 후 변화를 “산후 광증(狂症)”이라 명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배 집단인 주류 남성의 경험과 관점은 지식(과학)으로 간주되고, 여성의 몸과 심리는 배제되거나 비정상, ‘여성성’으로 오인돼 왔다.

팬지는 왜 그토록 화가 나 있으며,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까. 평론은 대체로 그녀의 외로움에 주목한다. 그러나 외로움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팬지가 보이는 불화와 배척은 타고난 기질이 아니라 사회적 억압과 소외의 결과로 보인다. 장녀로 어머니 돌봄을 도맡고 홀로 죽음을 지키며 무서웠던 기억, 인종 차별이 남은 사회에서 언제든 범죄자로 내몰릴 수 있는 흑인 아들을 둔 어머니의 ‘책임’과 불안, ‘어머니의 날’조차 가정 내 어머니(여성)의 역할과 의미를 기념하지 않는 남편의 무신경함, 만연한 왜곡된 여성성과 여성 혐오 등이 그녀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외로움과 불행을 벗어나기 위해 ‘결혼-가족 만들기’라는 관습적 생애주기를 따랐지만, 여전히 의무만 남은 일상과 변하지 않는 사회 환경에 폭발해버린 것이다.

겉으로는 모든 것에 분노하고 독설을 퍼붓는 듯 보이지만, 그녀의 분노를 되짚어보면 ‘레깅스 입은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인종 차별, 서비스직 감정노동, 여성 운전자 폄훼’와 같은 구체적인 사회문제를 역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팬지 곁에는 차별 사회를 비판하고 불안이 그저 개인의 탓이 아님을 공감하고 나눌 지지자가 없다. 그녀의 거침없는 말 뒤에는 ‘불편한’ 진심이 있다. 부부에게 닥친 사건을 계기로 팬지의 진심을 배우자가 ‘듣게’ 될까.

영화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지만, 이들은 새로운 길 앞에 놓였다. 부디 가부장제 규범이나 사회가 강요하는 ‘정상성’에 매이지 않고, 연민으로 서로를 돌보길 바란다. 팬지가 아내와 어머니라는 ‘사회적 가면’, 가족 규범에서 한 발 떨어져 나와 ‘나’를 아끼고 보살피길 바란다. 삶을 위협하는 현실문제에 더 깊이 분노하고 함께 싸울 벗, 동지를 만나길 바란다. 내 바람을 초월하는 ‘언니’들의 이야기, 개인의 불안과 분노가 사회적 구조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보여주고 세상을 바꾸는 “거룩한 분노”를 담은 여성 서사가 더 많아지길 희망한다. 80대 남성 감독이 세계 시민에게 내놓은 질문이 놀랍고, 무겁고, 반갑다.
*글 제목은 배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 10주년 기념판 「여성성의 신화」 서문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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