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자본 및 서유럽 중심 ‘민족’운동의 탈피
1880년을 전후로 하여 맑스와 엥겔스는 러시아 사회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인데 즉,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자본 중심적 시각을 탈피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848년 맑스 눈에 비친 러시아는 가부장적-봉건적 절대주의 체제였고 또한 혁명 세력에 반대하는 반동 세력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된 배경에는 서유럽 노동계급이 부르주아화되었기 때문에 혁명에 대한 전망은 더욱 어두워 졌다는 것이고 또한 식민주의가 후진지역에 자본주의 물적 토대를 제공해 줄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 중심부보다는 주변부에서 자본에 대한 공격이 더 용이할 것이라는 새로운 인식 즉, 식민지의 민족해방운동이나 러시아 같은 후진국의 혁명운동이 세계 혁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이론과 실천적인 면에서의 변화를 가지게 된 것이다.
1870년 12월 또마노프스까야가 맑스를 방문하여 러시아 촌락공동체의 장래와 그 발전 가능성에 대한 입장을 타진했을 때 맑스의 입장은 다소 모호 했다고 한다. 또한 체르니세프스끼에 호감을 표하면서 묘한 여운을 남겼다. 이는 지금까지 러시아 사회에 대해 보여준 바와 전혀 다른 입장이 아닐 수 없다. 그후 계속해서 체르니세프스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고 특히 그는 러시아의 토지 소유형태를 포괄적으로 다루겠다는 의욕적인 계획을 밝히기도 하였다. 또한 1875년 1월 프랑스어판 자본 1권 수정된 부분에서 ‘본원적 축적’에 관한 장에서 “직접 생산자를 생산수단인 토지로부터 분리시키는 본원적 축적 과정이 ‘서유럽’에 한정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이전과 달라진 것으로 모든 국가에서 본원적 축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내용과 대조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자본중심적인 및 서유럽 중심적 생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즉, 1875년 4월 맑스의 권고 아래 엥겔스가 쓴 한 논문에서 부르주아지가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에서 사회 혁명이 서구 보다 먼저 발생할 수 있다는 일련의 주장(뜨까체프)에 대해 반대를 분명히 했다. 또한 러시아가 공동노동조직인 아르쩰과 사회주의적 열정을 지닌 농민에 의해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 역시 반박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엥겔스가 러시아의 공동체적 토지 소유가 부르주아지의 사적 토지 소유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적 형태로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공동체적 토지 소유가 더 이상 와해되기 전에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승리한다면 그러한 가능성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맑스는 1877년 10월 미하일로프스끼가 기고한 논문에 대한 반박 편지에서 “(생락) 즉, 러시아가 1861년 이래 걸어왔던 길을 계속 걷는다면, 러시아는 역사가 그 민중들에게 지금까지 부여해 왔던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기회를 잃고 자본주의 체제에 운명적인 모든 영고성쇠를 겪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앞서 프랑스어판 자본 1권에서 본원적 축적에 관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를 비판하였다. 이 편지는 더 이상 러시아의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단계론적 입장을 고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후 맑스는 러시아 사회에 대한 많은 연구를 진행하였고 1880년에는 ‘인민의지당’의 활동가들의 방문을 받고 그들의 헌신적 활동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고, 그들의 강령을 분석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인민 의지당’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러사아에는 ‘인민의지당’과 ‘흑토재분배당’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인민의지당’의 경우 직접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내걸었고, ‘흑토재분배당’의 경우 촌락공동체의 해체와 자본주의 이행을 주장하고 있었다.
과거 맑스에는 후자 즉, ‘흑토재분배당’에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즉, 기존의 맑스의 이론에 정통한 것은 분명 ‘흑토재분배당’이었다. 즉, 이 당은 나중에 노동자 해방 그룹을 거쳐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위 정당인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으로 발전해 간 사실에서 입증된다. 그렇다면 베르슈타인 주장처럼 단순히 러시아 혁명가를 배려해주는 주장이기만 할까? 그렇지는 않다. 즉, 맑스가 보인 ‘인민의지당’에 대한 지지는 이론적 근거를 갖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자수리치에 보낸 4개의 장문 편지와 그것을 준비하느라 작성된 25페이지 분량의 초고에 보면 러시아 혁명과 촌락공동체의 역할에 대한 맑스의 이론적 근거를 읽어낼 수 있다. 이 편지는 1881년 2월 자수리치가 촌락공동체가 러시아 혁명전략에 어떠한 위치를 차지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맑스에게 자세한 의견을 구하였다. 이에 맑스는 자신의 건강상의 이유로 간단한 입장을 보냈다.
이 이론적 근거를 보면 프랑스어판의 ‘본원적 축적’에 대한 부분 인용한다. 즉, ‘서유럽’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러시아에 적용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만약 서유럽의 원칙을 지키려고 한다면 공동체 해체를 위해 농민을 추방시켜야 한다는 논리적 결론이 나오는데 이는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의 억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유럽에서는 역사의 진보와 함께 공동체적 소유토지가 사라졌는데 러시아가 과연 이러한 운명을 회피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맑스는 회피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러시아가 고립되었다면 그 운명을 회피할 수 없겠지만 이미 러시아는 세계시장이라는 근대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상황과 당시 서유럽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 혁명적 조건을 국민국가 차원에서가 아니라 국제적 차원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1850년대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즉, 영국의 야만주의가 인도의 물적 토대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던 것처럼 만약 러시아도 그러한 과정을 거친다면 인도와 마찬가지로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인도와 러시아에 대해서만 아니라 아시아사회까지 확대되는 일반성을 지니는 것이다. 또한 맑스는 엥겔스의 단서조항(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러시아 혁명의 전제조건이라는 단서도 붙이지 않았다.
결국 역사 발전의 단선론적 한계 비유럽 사회의 다양한 역사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유럽중심적 시각에서의 탈피 러시아 사회에서의 혁명 가능성 이런 것들은 후진국 민족혁명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맑스가 사적 유물론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즉, 논리적 분석 차원에서 단계론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분석 차원에 국한된 것이다. 즉, 러시아의 사회 혁명은 자본주의 세계 시장의 물적 토대를 전제할 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을 보면 논리적 의미의 단계론의 포기는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이 러시아 농업 사회문제에 있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맑스의 정통적인 입장이 아니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맑스의 유연한 변화에 대한 입장은 자수리치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을 뿐 자본과 같은 이론적 저작에는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맑스 사후에 엥겔스가 집필한 자본 3권에서는 러시아가 여전히 정체적인-동양적 전제 주의 사회로 묘사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엥겔스는 맑스 사후인 1894년에 논문을 작성하였다. 여기서 그는 사회주의로의 직접 이행을 주장하는 뜨까체프를 다시 블랑끼스트라고 정정하여 비판하는 것으로 논문을 시작하고 있다. 엥겔스에 의하면 러시아의 촌락공동체는 더 높은 차원 즉 사회주의 공동체적 토지소유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 자극을 산출하지 못했으며, 1861년 이래로 계속 해체되는 경향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서유럽의 경로를 뛰어 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단축 시킬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고 지적하고 단축의 문제는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전제되어 서유럽 노동자들의 지원을 받을 때 가능하다며, 이는 러시아뿐 아니라 전 자본제적 사회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1892년 공상당 선언 러시아판 서문과 큰 시각 차이를 보이는데 이에 대해 엥겔스는 1882년 이래 러시아의 산업화가 급격하게 진전되어 자본주의 도입이 불가피한 상황의 변화때문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만 중요한 것은 엥겔스가 러시아의 촌락공동체가 사회주의 이행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맑스의 생각에는 찬성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진다. 만약 자본 3권을 맑스가 집필했다고 하였다면 러시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7) 사족..
맑스와 엥겔스에게 있어서 ‘민족’은 잠정적인 개념이다. 즉, 부르주아지의 성장과 함께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 역시 노동계급을 부르지아 혁명에 동참시키기 위한 호소일 뿐이다. 특히 내외적 적에게 포위된 부르주아지는 노동계급을 혁명에 동참시킬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선택한 것은 '민족주의‘라는 수사였다는 것이다.
결국 민족은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등장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민족’이 아니라 국제적인 형제인 것이다. 특히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 서유럽 중심주의와 자본중심주의적 시각을 유지했다. 하지만 곧 그들은 특히 맑스는 러시아 사회에 대해 연구와 역사적 관점에 따라 서서히 그러한 시각을 폐기한다. 이는 자신의 좌우명대로 죽기 전까지 역사 발전과 사회현상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로 사회를 보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맑스와 엥겔스의 ‘민족’과 ‘민족주의’ 그리고 ‘민족해방운동’에 관해서 맑스주의자들은 어떠한 입장을 견지 했을까?
“모든 것을 의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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