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민족 자치론
로자는 1900년대의 폴란드 왕국 및 리투아니아 사회 민주당의 강령(주1)들에서 더 높은 수준의 자치론으로 발전시켰다. 제르친스키가 체포된 후 로자 반대파가 이끄는 이 당은 2차 당대회에서 ‘민주주의 러시아의 연방 구조 안에서의 민족체들의 완전한 자치’를 결의하였고 3차 당대회에서는 역시 연방제의 기초 아래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 인민의 가능한 한 가장 폭넓은 자치’동의안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주의를 쟁취한 뒤에는 폴란드의 재건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원칙적으로 부정하지도 않았다. 즉, 민족 독립의 원칙을 전적으로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로자는 당 중앙으로 복귀한 후 4차 당 대회의 요청으로 1903년 새로운 당 강령인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를 집필했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 할 때까지 당의 유일하고 완전한 강령으로 인정되었다. 이 신강령은 민족 문제에 관한 한 폴란드 왕국 사회 민주당의 옛 강령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을 안고 있다.
2조(주2)의 핵심적 문제 ‘나라의 자치’ 혹은 ‘폴란드의 자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이다. 즉, 보통, 비밀, 평등,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될 이 의회는 민족 관료의 선출 뿐 아니라 교육 사법 및 기타 행정 기구들을 관장할 것이었다. 즉, 로자는 지방 자치를 넘어서는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영방적 자치 또는 준국자적 자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 강령 4조에서도 별도의 언급을 하고 있는데 로자의 경우 자치의 개념을 민족체의 문화적 자치 차원을 넘어서 정치와 사회 경제적인 영역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주3)
로자의 경우 자치 개념을 사회 경제적인 영역에 투사함으로써 자치 문제는 ‘자본주의 경제의 구체적이며 불가피한 결과’라고 보았다. 특히 로자는 고유한 부르주아적 발전과 도시적 삶, 독자적인 인텔리겐챠와 문학 그리고 지적인 역량을 갖춘 민족체에 한해서만 ‘특정한 민족체 영역의 자치 정부’를 인정했다.(주4)
그렇다면 로자의 경우 완전한 자치를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의 독립과 민족 자결권에는 그토록 반대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는 민족 문제의 전술적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닌 로자의 경우 민족 자결권이 피억압 민족의 인민 대중에게 지니는 호소력을 이해하는데 실패한 것은 아닌 가하는 것이다.
로자의 맑스 독해는 그 역사성을 강조한다. 즉,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로자의 기본 입장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나 절대적으로 그른 것은 없다는 것이다. 로자에게 중요한 것은 폴란드 문제에 대한 맑스의 낡은 견해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방법을 변화된 역사적 조건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맥락에서 로자는 민족 문제에 대해 일방적으로 맑스와 엥겔스의 노선을 따르기를 거부했다.(주5) 로자에 의하면 20세기 전환기에 역사적 조건은 크게 변화하였다. 자본주의의 거침없는 발전은 러시아를 반동의 보루로부터 유럽 혁명의 진원지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이 폴란드 독립을 더 이상 무망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주6)
로자는 레닌의 민족 자결권을 비판하면서 레닌의 제안에 따라 폴란드 왕국 및 리투아니아 사회 민주당과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조직적 통합이 시도된 1903년에도 로자는 비판의 자세를 감추지 않았다. 그것은 이해의 통합 시도가 무산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레닌은 어떠한 경우에도 폴란드의 프롤레타리아가 자유로운 폴란드 독립 공화국의 슬로권을 옹호하는 것을 배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로자는 민족 자결권을 명시한 당 강령 초안 7조의 채택을 연기하도록 러시아의 동지들에게 요구하라고 요기헤스에게 전보를 쳤다.(주7)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주8) 로자는 자의적으로 당 대회의 결정 사항을 뒤집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로자가 민족 자결권에 대해서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했는가이다. 즉, 민족 자결권이 폴란드 사회당의 사회 애국주의에 정통성을 부여할까 두려웠던 것이다.(주9) 레닌은 줄곧 폴란드 왕국 및 리투아니아 사회 민주당에게 분리의 자유까지 포함한 민족 자결권을 받아들이도록 충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레닌과 로자가 항상 충돌만 했던 것은 아니다. 카우츠기 등의 구명운동으로 차르의 감옥에서 석방된 로자는 1907년 5월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 제 5차 당 대회에 참석하였다. 로자는 레닌의 편에 서서 분트 및 멘세비키 기회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민족 문제에 관한 한 결코 레닌에 동조하지 않았다.(로자는 민족 자결권에 대한 강조를 ‘레닌의 취미’라고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레닌의 민족 자결권에 대해서 로자의 비판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자본주의 역사적 조건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유럽 제국주의와 국제 무역이 역사적으로 보아 원시 사회에서 존재하고 있던 자결의 수단을 모두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근대 자본주의 발전은 그 통합적 발전 경향으로 말미암아 각 민족체에게 독립의 상태로 회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 발전에도 불구하고 각 민족체의 독립을 추구한다면 역사적 대세를 거슬러 다시 중세의 소규모 봉건 국가로 역행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주10)
둘째, 맑스주의의 기초인 계급 이론과 어긋난다는 점에서 레닌의 민족 자결권은 또 다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로자는 단일한 사회-정치적 실체로서의 민족은 계급 사회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해의 일치 시기(부르주아 혁명기)는 이미 지나갔으며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간의 계급 대립은 한층 첨예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 민주당의 사명은 민족 자결권이 아닌 ‘노동자 계급의 자결권’ (주11)을 실현하는데 있다.
로자가 민족 자결권을 부정했다고 해서 민족적 억압을 용인했던 것은 아니다. 로자는 모든 형태의 민족적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의무라고 뚜렷이 밝혔다. 로자는 민족 해방의 길을 민족 자결권이 아니라 사회주의 승리 그 자체에서 구했다. 로자에게 있어서 민족적 억압은 ‘징후’이지 ‘원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민족적 억압과 성의 억압을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인간적 억압은 사회 해방과 더불어 자동적으로 해소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근본주의적 믿음과 완벽성과 엄격함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이념투쟁에서 배태된 것이다.
로자는 노동계급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중의 창발성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음모적인 방식의 운동을 배척했다. 즉, 관료적 중앙 집권주의는 지식인들의 권력욕만 만족 시킬 뿐 노동자들을 일개 중앙위원회의 가련한 도구로 만들 것이라는 경고도 있지 않았다. 로자는 노동계급 이라면 마땅히 민족주의와 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감염되지 않고 순수한 혁명의 길로 올곧게 전진하리라는 믿음을 살해당할 당시에도 굳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동계급에 대한 순수한 믿음은 대중들의 민족주의의 초계급적 통합 기능을 이해하는데 많은 한계를 노정시켰다. 계급적 이해와 초계급적 이해들이 얽혀서 빚어내는 민족주의 운동의 역사적 구체성을 간과하였다. 결국 노동계급에 대한 역할만 강조하다 보니 농민과 중간계급의 역할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했다.(주12)
4) 덧 붙혀서..
(자유로운 영혼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가 매우 인간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녀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얼마나 그녀가 인간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녀가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는지.. 감옥도 그녀의 영혼을 가두지 못했다.
감방 화장실 창가에서 죽어가는 공작 나비를 살리고는 어린애처럼 기뻐하는 모습, 첫 사랑 요기헤스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진 사랑을 아는 여인.. 자신의 감방을 찾는 굴뚝새와 개똥지빠귀에게 줄 해바라기 씨앗을 넣어주도록 부탁하는 여인..
귀한 손님을 초대하면 캐비어와 샴페인을 대접하였으며, 가구와 그림 그릇 등 일상적 소품들도 취향에 맞게 골랐던 여인.. 그런데 그녀는 항상 가난에 찌들려 살아 항상 첫 사랑 요기헤스에게 돈을 보내달라고 했던 가난했던 부자의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은 좌우를 막론하고 사회주의 혁명투사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인 것이다. 이런 모습에 다른 이들은 당혹스럽기도 하겠지만 내가 로자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유로운 영혼 로자 룩셈부르크에 실린 편지글 몇 개만 발췌한다.
“정말 그 아이를 안고 그대로 뛰고만 싶었어요. 오, 디오디오, 우리 아기는 가질 수 없는건가요? 그리고 집에서는 절대로 다투지 않을 거예요. 그럴 거죠. 우리집은 조용하고 평화로울 거예요. (중략) 지구상의 어느 부부도 우리처럼 완벽한 쌍이 되지는 못할 거예요. 조금만 노력하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어요.(중략) 오, 디오디오! 제발 빨리 여기로 와요!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우리만의 시간을 가져요. (중략) 디오디오, 내 사랑, 당신을 껴안고 수천번이고 키스하고 싶어요. 그러면 당신이 날 번쩍 안아 올려 주길 바라지만 당신은 늘 내가 너무 무겁다는 핑계를 대지요.
- 오래전 그때처럼 함께 할 수 있다면 (1899년 3월 6일) -
“이곳에 부족한 것이 하나 있어. 그건 바로 마음대로 돌아 다닐 수 있는 자유가 없다는 거야. (중략) 하지만 답답한 마음이 들 때면 상쾌한 공기와 정원 그리고 새를 떠 올려. 내가 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마 아무도 모를 걸?”
-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1917년 8월 2일) -
“난 완전히 혼자 남아 무슨 상상이든 할 수 있고 아무도 몰래 저 높이 나는 까마귀와도 인사도 할 수 있지. 가벼운 산들바람이 불고 난 바람속에서 봄처럼 온화한 편안함을 느껴. 죄수들은 공터를 가로질러 실내로 무거운 솥을 나르면 사람들은 둘씩 짝지어 순서대로 이동하기 시작해. 난 맨 끝에 서지. 공터도 건물도 조금씩 어두워져가. 실내로 들어서면 문은 이중으로 잠기고 빗장을 치는 소리가 들려. 그럼 이제 하루가 다 간 거야.”
- 하루가 지는 풍광 중에서(1717년 11월 24일) -
주1) 폴란드 사회주의자인 제르진스키 주도 아래 폴란드 왕국 사회 민주당과 리투아니아 사회 민주당의 통합 조직으로 결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제르진스키가 체포 된 이래 당의 주도권은 트루시에비츠가 이끄는 로자 반대파의 수중에 떨어졌다.
주2) 러시아 국내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체에게 고유의 문화 발전을 보장하는 민족체간의 완전한 평등 ; 민족어 학교와 모국어 사용의 자유 ; 전체 나라의 자치 혹은 폴란드의 자치
주3) 로자가 프로이센 점령 지역 폴란드인들의 민족어와 민족 문화를 지키는데 열심히였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외로 보인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은 포젠과 슐렌지엔에 사는 3백만 폴란드인들을 당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로자를 독일의 사회주의의 무대로 끌어 들였다. 이 지역에의 폴란드인들은 각급 학교에서 폴란드어의 사용을 금지한 프로이센의 교육 법령과 비스마르크의 문화 투쟁에 대항해서 카톨릭 보수파인 중앙당의 그늘 아래 있었다. 또한 맑스주의에 경도된 노동자들조차도 독일 사회 민주당의 연합보다는 폴란드 사회당의 애국주의적 선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형편이었다.
로자에게 주어진 임무는 중앙당과 폴란드 사회당으로 기운 폴란드인들의 지지를 독일 사회 민주당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었다. 로자는 ‘우리말’과 ‘우리 민족체’에 대한 프로이센 공권력에 맞서 폴란드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독일 노동 인민과의 연대를 통해 독일 및 폴란드 지배 계급의 계급적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유기적 통합 이론의 경제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로자는 민족 문제에 관한 한 언어와 문화의 중요성을 잘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로자는 독일 사회 민주당의 동료들이 정치적 통합과 완전한 동화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늘 불만이었다. 즉, 자본주의 발전의 구심적 통합 경향에 걸맞는 민족들의 정치적 통합이었지 고유의 언어와 문화까지 부정하는 완전한 동화는 아니었던 것이다.
주4) 로자의 경우도 1848년 당시의 맑스와 엥겔스가 지녔던 ‘무역사적 민족’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즉, 로자에 의하면 벨로루스인,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리투아니아인들은 경제적 후진성 때문에, 유대인의 경우는 비록 자본주의를 경험하고 있으나 독자적인 영토가 없다는 점에서 근대적 자치 민족의 대열에 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주5) 맑스와 엥겔스는 1848년 혁명 당시 남슬라브족을 무역사적 민족으로 치부하고 이들의 민족적 자유를 유럽 민주주의에 종속시킨바 있다. 또한 폴란드의 독립을 일관되게 옹호했고 크리미아 전쟁에서는 터키편에 섰다.
주6) 그렇다고 해서 맑스의 방법론이 지닌 가치가 손상되었다고 보지는 않았다. 로자에 의하면 ‘맑스는 한번도 자신에게 오류가 없다고 주장한 적이 없으며,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역사적 판단이라는 말 만큼 맑스의 과학적 정신에 어긋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로자는 맑스가 가장 좋아했던 ‘모든 것을 의심하라’에 가장 충실하였다.
주7) 요기헤스는 로자에게 동지이자 연인이었다. 요기헤스에게 보낸 편지를 한번 읽어보면 그녀의 인간적인 면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로자’를 상상하고 있는 고정 관념을 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기헤스는 1907년 폴란드 왕국 및 리투아니아 사회 민주당의 당권을 장악한 이후 의도적으로 로자를 폴란드 문제로부터 격리시켰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폴란드 무대로 격리가 민족 문제에 대한 로자의 관심 영역을 더 넓혀 주었다.
주8) 로자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폴란드의 사회 민주당들간의 통합은 로자와 요기헤스가 바르샤바의 감옥에 있던 1906년 6월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주9) 사실상 레닌은 폴란드 사회당 우파가 볼세비키 혁명에 부정적 태도를 보였던 1917년까지 폴란드의 독립 슬로건을 옹호했다.
주10) 루이 보나빠르뜨의 ‘민족체 원칙’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을 상기 시킨다. 즉, 민족 자결권과 민족체 원칙에 대한 각각의 비판을 통해 로자와 엥겔스는 모두 저개발국의 민족주의 운동이 복고적이고 반동적이라는 입장을 은연중에 밝히고 있다.
주11) 폴란드의 부르주아지는 러시아 시장과 유기적 통합으로 인해 여기에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자연히 민족 운동과 거리가 멀고, 노동자 계급은 러시아 노동자와 연대하여 짜르 타도에 관심이 있는 반면 오히려 봉권 귀족과 쁘띠 부르주아지가 민족 운동을 주도 하고 있어 민족 분리 혹은 민족 독립은 반동의 표현일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하에서 민족 자결권은 불가능하고 이를 지지 하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주12) 로자는 소농에게 토지를 약속한 레닌의 공약을 농민의 지지를 구하기 위한 ‘뇌물’이라고까지 비난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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