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호]의사 선생님 잘 좀 봐주세요

[상담실]
작성자
mklabor
작성일
2023-05-15 17:34
조회
1218


김남욱  바른길 노무사  공인노무사


2022년 7월 1일, 근로복지공단이 제정·시행한 “발생빈도가 높은 근골격계 상병 업무상 질병 조사 및 판정지침”에서는 음식 서비스 종사원이 2년 이상 음식 서비스 업무를 수행하던 중 수근관증후군(손목터널증후군)에 걸리거나 2년 이상 음식 서비스 업무를 수행하고 이를 그만둔 후 6개월 이내 수근관증후군(손목터널증후군)에 걸리는 경우를 이른바 ‘추정의 원칙’ 적용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 말한 요건이 충족되어 추정의 원칙 적용 대상인 것으로 인정되고 근로복지공단의 특별진찰 결과 업무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인정되면, 해당 재해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아 산재 요양이 승인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상담실에는 10년 넘게 음식 서비스 업무를 수행하다가 양쪽 손목에 수근관증후군이 발병하여 어쩔 수 없이 퇴사한 노동자가 찾아왔다. 어떤 일을 하셨는지 설명을 쭉 들어보니 추정의 원칙 적용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산재 신청을 해보자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산재 신청을 위해서는 ‘요양급여 신청 소견서’가 필요하니 병원 가셔서 발급받아 오시라고 안내드렸다. 그런데 며칠 뒤 진료 예약일에 병원에 방문한 노동자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의사가 소견서 못 써주겠다고 하네요.”

사실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종종 있는 일이다. 재해노동자가 산재 신청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어떤 질병이 진단됐는지, 예상되는 치료 기간은 어느 정도인지, 치료하면서 일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등의 내용이 포함된 요양급여 신청 소견서를 직접 검사하고 진단한 주치의가 작성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가끔 ‘자신은 이 상병이 업무상 질병이 아니라 생각한다’거나 그 외 몇몇 이해하기 어려운 사유로 주치의가 요양급여 신청 소견서 작성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의사가 아닌 나로서는 주치의의 소견이 맞다, 틀렸다 평가할 자격도 능력도 없으니 가타부타할 것도 없겠지만 주치의에게도 해당 질병이 업무상 재해인지 아닌지를 평가할 권한은 없다. 진단된 질병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근로복지공단이 판단할 일이다. 다만 최근 근로복지공단은 이처럼 주치의가 요양급여 신청 소견서 작성을 거부하는 문제가 많아 진단명만 제대로 확인되면 진단서나 일반 소견서로도 신청을 받아주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기는 하다.

문제는 힘들게 산재 요양 승인을 받고 치료를 받던 중 갑자기 요양 기간이 종결되어 버리는 경우다.
산재 요양 기간은 주치의가 보통 3개월 단위로 근로복지공단에 진료계획을 제출하면 근로복지공단이 이를 승인해주는 절차로 결정된다. 그리고 주치의가 진료계획을 올리는 시점은 대략 요양 기간 종결 1주 내지 2주 전인데, 계속해서 통증이 심함에도 주치의가 진료계획서 올릴 즈음에 그 작성·제출을 거부해서 요양 기간이 종결되어 버리는 때가 있다.
통증이 심해 당연히 요양 기간이 연장될 줄 알고 있었던 재해자로서는 요양 기간 1주 내지 2주 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니 갑작스러울 따름이다. 물론 통증이 남았다고 해서 무조건 요양 기간이 연장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치료를 계속했을 때 호전될 수 있는지가 요양 기간 연장 여부를 결정하는 주요 기준이기는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주치의가 진료계획 제출을 거부했을 때 재해노동자가 이를 다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주치의가 진료계획을 올리고 근로복지공단이 이를 거부하면 그 거부 처분의 취소를 다툴 수 있겠지만 주치의가 애초에 진료계획을 올려주지 않으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받은 처분이 없으니 이 문제를 다툴 대상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치료가 필요 없다거나 더 이상 치료해도 호전될 가능성이 없다는 소견이라면 이를 존중할 수밖에 없지만 주치의 단 한 명의 소견만으로 재해노동자가 요양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체계는 아무래도 온전치 않아 보인다.

앞서 음식 서비스 업무에 10년간 종사하고 수근관증후군을 진단받았다고 소개한 노동자도 지난한 기다림 끝에 추정의 원칙을 적용받아 산재 요양 승인을 얻어냈지만 승인 통지를 받고 3주가 채 지나지 않아 요양 기간이 종결됐다.
주치의가 진료계획서를 제출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초 요양 신청 당시 아직 수술 전이었던 왼쪽 손목의 수근관증후군이 요양 신청 대상에서 누락되어서 노동자가 이에 대한 추가상병소견서를 요청한 것마저 거부당했다. 오른쪽 손목과 같은 날 똑같이 검사까지 받았음에도 말이다.

산재보험제도가 업무상 재해라는 부상·질병·장해·사망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의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의사가 재해노동자들을 힘들게 한다는 의미도 절대 아니다. 하지만 산재보험제도의 목적 자체가 노동자의 업무상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산재보험법 제1조)하려는 데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재해노동자가 단 한 사람의 소견에 의해 무력해 질 수밖에 없는 지금의 체계는 반드시 보완이 필요하다.

모든 재해노동자가 공정하게 보상받을 수 있게 요양 기간 결정과 추가상병신청 등 주치의의 소견이 반드시 필요한 절차에 있어서는 재해노동자가 이를 다퉈볼 수라도 있게 적절한 창구나 방법이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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