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호] 여전히 프리랜서

[활동 글]
작성자
mklabor
작성일
2023-05-15 17:26
조회
1113
게시글 썸네일

최태경 경남CBS 프리랜서 아나운서


 

안녕하세요? 저는 경남CBS에서 복직 후 6개월째 ‘여전히’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최태경 아나운서입니다.
저는 부산CBS와 울산CBS, 그리고 경남CBS에서 7년 넘게 일했습니다. 스스로 CBS사람이라고 자부할 만큼 회사에 대한 애정이 컸습니다. 연인 사이에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을이 된다고 하죠. 이미 갑과 을의 관계, 여기에 회사를 사랑하기까지 했으니 저는 그야말로 슈퍼 을이었습니다.

경남CBS에 첫 출근을 하자마자 저는 정규직 업무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정규직 아나운서들이 입사와 퇴사를 반복할 때마다 모든 정규직 업무는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정규직도 피하는 광고편성 업무를 하루 5번씩 했고, 사옥 이사를 앞두고는 직원들과 먼지를 마셔가며 이삿짐을 싸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방송시스템을 배우기 위해 서울에서 온 엔지니어로부터 밤 10시가 넘도록 교육을 받기도 했고요. 방송통신위원회에 제출해야 하는 방송국 재허가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밤샘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남CBS는 다시 정규직 아나운서를 채용했습니다. 그리고 2년 8개월 만인 2021년 12월 31일, 저는 해고를 당했습니다.

저는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입니다.
아나운서에 도전한 것이 제 평생 처음으로 낸 용기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평생 두 번째로 용기를 내서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했습니다. 차근차근 부당해고 구제 절차를 밟으면서 확신이 생겼습니다. ‘나는 이름만 프리랜서였지 노동자였구나’ 하고요. 9개월에 걸쳐 경남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는 저를 ‘기간이 정함이 없는 근로자’로 인정했고, CBS에 저를 ‘원직복직 시키라’는 구제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9월 초, 사측은 저에게 복직이행명령서를 보냈습니다. 복직이행명령서를 받은 날, 눈물이 났습니다. ‘이제 회사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정규직으로 떳떳하게 일할 수 있겠구나’ 싶었거든요. 하지만 그 때는 몰랐습니다. 제가 사측을 상대로 다시 한 번 투쟁에 나서게 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2022년 10월 4일, 저는 회사로 복귀했습니다. 그런데 제 책상에 있어야 할 컴퓨터가 치워져 있었습니다. 제 고정좌석도 프리랜서 공용좌석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총무국장에게 근로계약서는 언제 작성하는지 문의했습니다. 돌아온 답변은 “‘원직복직’을 시키라고 했으니 우리는 너를 예전에 일했던 프리랜서로 복직시킨다. 때문에 근로계약서는 작성하지 않는다.”였습니다. 사측은 노동위의 판단은 무시하고 ‘원직복직’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저를 프리랜서로 복직시켰습니다. 노동위에 이 사실을 알렸지만 노동위는 뒷짐만 지고 있었습니다. 이후 사측은 차례차례 저의 근로자성을 지워갔습니다. ‘아나운서’라는 이름도 방송에서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서울 본사는 경남CBS에 ‘최태경과 한 마디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편성팀장은 방송원고 결재 라인을 없앴습니다. 제게 직접적으로 업무지시를 하지 않기 위해 회사에는 제 전용 서류함이 생겼습니다. 제게 지시할 사항이 적힌 서류를 서류함에 두면 제가 수거해가는 겁니다. 늘 참석하던 아침 직원예배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오후 6시까지 남아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제지당했습니다. 출근인사도, 퇴근인사도 무시당했습니다. 복직 후 근로환경은 더 후퇴했고, 저는 불가촉천민이 됐습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습니다. 이미 방송 비정규직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판정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속속 원직복직 소식도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프리랜서 원직복직’은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자칫 방송 비정규직의 투쟁에 제가 나쁜 선례로 남을 수 있었고, 방송사들이 악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번 더 용기를 내기로 했습니다.
2022년 11월 10일 서울에 있는 CBS 본사 앞에서 ‘정상적인 원직복직을 이행하라’는 내용으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기자회견 날, 저는 기자들 앞에서 마스크를 벗고 이름을 공개했습니다. 적극적으로 투쟁하겠다는 제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어딘가에서 홀로 싸우고 있을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습니다. 이후 기자회견과 토론회 등을 통해 프리랜서 원직복직의 부당함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사측은 중앙노동위의 판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저의 투쟁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사회에 정의를 요구하던 언론이 이제는 정의를 요구받는 시대가 됐습니다.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투쟁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길은 너무나 낯설고 험하며 끝을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저희에겐 거대 방송사라는 험준한 산을 함께 넘어줄 셰르파가 필요합니다. 산 속 지리를 잘 알고, 산을 넘어본 경험이 있는 셰르파 말입니다. 우리가 함께 걸으며 낸 길은 수많은 방송 비정규직들이 걷는 투쟁의 길이 될 것이며, 언론개혁의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이 길을 함께 걸읍시다. 수많은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손을 잡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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