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호]520번의 금요일, 그리고 봄 세월호 참사 10주기

[초점]
작성자
mklabor
작성일
2024-04-11 16:47
조회
126
게시글 썸네일

     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센터장


 

“머리로는 다 이해가 되는데
마음으로는 어려워요.
우리가 지금 다른 참사까지
살필 상황이 되는 건가?
우리도 해결된 게 없는데.”

재난피해자권리센터의 설립을 준비하며 세월호참사 희생자인 상준이 엄마 강지은님이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2022년 9월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만들어졌던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 활동이 종료됐다.
사참위는 8년 동안 9개의 국가기구에 걸친 진상규명조사의 끄트머리에 선 듯 보였다. 하지만 참사의 원인은 여전히 안개 속에 놓여 있었고, 어렵게 법정에 세운 책임자들에겐 연이어 무죄가 선고됐다. 2024년 개관을 목표로 삼았던 생명안전공원은 아직 첫 삽도 뜨지 못한 상황이었다.
2022년 10월 159명을 참담하게 놓쳐버린 10.29이태원 참사는 ‘우리가 이렇게 외친다고 세상이 변하기는 하는 걸까?’라는 깊은 좌절과 비통함 마저 안겼다. 무고한 청년들의 죽음에 세월호참사 피해 가족들은 마치 자신의 가족을 또 한번 놓친 듯 힘들어 했다. 8년을 내달려왔던 가족들이 길을 잃은 듯 보였다. 적잖은 시간 인권운동을 해왔던 나 역시 이런 막막함과 참담함은 처음이라 잘 삼켜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들의 손을 붙잡아 재난참사의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른 재난 피해자들과 시민들을 모아 함께 행동하기 위한 둥지를 만들고, 새로운 길을 내보자라는 건 서로에게 너무 가혹한 듯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라도 재난 피해자들의 권리를 곧추 세워야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절감하기도 했다. 활동가들이 먼저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재난 피해자들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선언은 세월호 참사 이후 부인하기 어려운 명제로 자리잡기 시작됐다. 전국을 뒤덮은 노란리본은 재난 피해자가 사적 애도를 넘어 사회적 애도를 받을 대상이라는 걸 인식하게 만들었고, 과거 실종자로 불렸던 이들이 미수습자로 명명되어야한다는 기나긴 외침 속에서 국가는 수습의 책무를 부여받았다. 재난은 딛고 일어나 극복하는 사고 아니라 진상이 밝혀지고 제대로 된 책임을 물어야하는 사회적 사건이라는 걸,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과 심리적 치료 등은 시혜나 자선이 아닌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 공동체가 져야할 책무이자 보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 반드시 치러야할 댓가라는 것도 차츰 사회에 뿌리를 내려갔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참사로 건설관련 제반 제도들이 정비되고,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로 가연재로 만들어졌던 지하철이 난연재, 불연재로 다시 만들어졌던 것처럼, 2014년 세월호 참사는 재난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재난피해자의 권리를 새롭게 구성하고 각인시켰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들은 무고한 희생에 따른 자연발생적 선물로써가 아닌 사랑하는 이를 참담하게 놓쳐버린 무수한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의 삭발, 단식, 도보행진, 오체투지 그리고 삶을 놓을 수도 살아낼 수도 없는 고통과 절규 속에서 왔다. 사실 변화는 보이지 않은 이들의 피, 땀, 눈물에 빚져 도래하고, 권리란 애초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외치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도래해왔던 인권의 역사가 재난 피해자 권리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했다.
우리처럼 오래, 우리만큼 깊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하지만 사회의 변화가 정치, 법, 행정의 변화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에 2022년부터 2년간 416재단 활동가들과 세월호참사 가족들은 전국을 돌며 다양한 재난 피해자들을 만났다. 혼자가 아닌 함께, 과거로 되돌릴 순 없지만 미래를 바꾸기 위해 재난 피해자들의 연대체를 만들어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재난 피해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재난 피해자들을 연결하며 지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재난피해자권리센터를 만들자고도 설득했다. 모든 재난 피해자의 권리 옹호는 2018년 설립된 416재단의 주요한 소명 중 하나였으며, 누구보다 오래 싸워왔던 세월호참사 가족들은 누구보다 재난 피해자 권리의 필요성을 온몸으로 체감해왔기 때문에 때론 비틀거렸으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만남과 설득, 아픔과 진심이 닿아 가습기살균제참사(1994), 삼풍백화점 붕괴참사(1995),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참사(1999), 인천 인현동 화재참사(1999), 대구지하철 화재참사(2003), 7.18공주사대부고 병영체험학습 참사(2013), 4.16세월호 참사(2014), 스텔라데이지호 침몰참사(2017) 등 8개 재난 피해자들이 우리가 겪은 참사를 다시는 아무도 겪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혹여라도 동일한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처럼 오래, 우리만큼 깊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2023년 12월 16일 ‘재난참사피해자연대’를 발족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50여일이 지난 2024년 1월 31일 재난 피해자들의 권리증진을 수임사항으로 하는 국내 최초의 민간단체 재난피해자권리센터가 ‘우리함께’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재난참사피해자연대는 피해당사자 단체라는 정체성을,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이하 센터)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지원을 받아 416재단 부설로 만들어진 권리옹호단체라는 차이를 갖고 있지만, 생명안전사회를 꿈꾸며 만들어진 두 단체는 기꺼이 서로의 곁이 되어 함께 가기를 선언했다.

피해자에, 피해자에 의한,
피해자를 위한 센터

세월호참사 이후 동료들과 재난참사를 기록하고 연구해오며 피해자들의 연대와 센터 설립에 초기부터 관여해왔던 나는 센터에 합류했다. 마침 그때는 세월호참사 가족들의 요청을 받아 지난 10년에 걸친 가족들의 운동과 역사를 정리하는 기록, <520번의 금요일>(2024년 3월 출판, 온다프레스)을 한참 집필 중이었다. 가족들이 걸어온 한 해의 일정만 열거해도 수백 건에 달하는데 10년의 시간을, 따로 또 함께 몸과 마음에 새겨진 기억과 경험을 기록할 자신이 없어 몇 번이나 고사하다 맡았던 작업이었기에 부담도 고됨도 컸지만 자부심 또한 적지 않았다. 우리가 어디만큼 와있고, 무엇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하는지를 톺아보며, 이런 고통과 비통함을 견디지 않아도 될 사회이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커져갔다. 그 흐름 속에서, 대한변호사협회와 (사)김용균재단, 다산인권센터 등이 협약을 통해 센터의 든든한 지킴이가 되어주길 약속한 것처럼 나 역시 재난 피해자 중심의 접근을 통해 재난 피해자들의 권리 증진과 관련 정책 및 제도 변화, 시민인식 향상을 위해 한 발 더 내딛어 보길 다짐했다.
봄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따뜻한 온기 속에서 도래하는 것이라 믿으며. 참담함으로 세상을 견디고 있을 재난 피해자들을 찾아 서로를 연결하고 지원하는 일은 센터의 가장 중요한 소명이다. 재난 피해자들이 상처받은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치유자가 될 수 있도록 전문적 역량을 강화하고, 재난참사피해자연대와 함께 재난 상황에서 전문적인 조력이 가능한 안정적 체계 구축은 센터를 향한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전국의 다양한 전문 기관들을 모으고, 수시로 운영되는 416긴급지원기금과 함께 연계하는 것은 재난 피해자의 회복과 권리 보장에 매우 효과적인 디딤돌이 될 것이다. 인권에 기반한 재난 예방, 대응, 회복을 위해 관련한 정책을 고안, 연구하며 사회화하는 것, 재난 피해자 권리 매뉴얼을 만들고 교육시키는 활동 역시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센터의 문턱을 낮추고 재난 피해자 권리에 대한 상상력을 더하기 위해 다양한 시민들이 모일 수 있는 전시회, 강좌, 영화상영 등의 자리를 만드는 것 역시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시민이 함께 할 때 생명안전사회에 한 걸음 더 빨리, 단단히 다가갈 수 있다.
일꾼은 적건만, 할 일은 많고, 기대는 무겁다. 무수한 시행착오에 고단한 여정이 되겠지만 곁을 지켜주는 이들이 있다면 센터는 조금씩 나아갈 것이다. 재난참사 피해자의 희생에 빚져 우리가 오늘을 살았다. 이제 우리가 그들이 내일을 살아갈 힘을 채워줄 차례기 때문이다.
전체 0

전체 359
번호 썸네일 제목 작성일 추천 조회
공지사항
[여는 생각] [128호]가짜 뉴스로 시작된 고용노동부 특정 감사와 산재보험 60주년 (6)
mklabor | 2024.04.11 | 추천 0 | 조회 493
2024.04.11 0 493
358
[현장 보고] [128호]고용노동부 근로복지공단 특정 감사 비판 해설
mklabor | 2024.04.11 | 추천 0 | 조회 118
2024.04.11 0 118
357
[건강하게 삽시다] [128호]알레르기
mklabor | 2024.04.11 | 추천 0 | 조회 246
2024.04.11 0 246
356
[산재 판례] [128호]산재 카르텔을 보다, 사업주의 산재 취소소송, 산재소송 보조 참여.
mklabor | 2024.04.11 | 추천 0 | 조회 121
2024.04.11 0 121
355
[만나고 싶었습니다] [128호]가자! 2024년 산추련 운영위원들
mklabor | 2024.04.11 | 추천 0 | 조회 115
2024.04.11 0 115
354
[상담실] [128호]‘소음성 난청’도 산재가 되나요?
mklabor | 2024.04.11 | 추천 0 | 조회 125
2024.04.11 0 125
353
[일터에서 온 편지] [128호]냉소하지 않고 연대하겠습니다.
mklabor | 2024.04.11 | 추천 0 | 조회 245
2024.04.11 0 245
352
[초점] [128호]520번의 금요일, 그리고 봄 세월호 참사 10주기
mklabor | 2024.04.11 | 추천 0 | 조회 126
2024.04.11 0 126
351
[현장을 찾아서] [128호]외투자본에 대항하여 우리 노동자의 매운맛을 보여주자!
mklabor | 2024.04.11 | 추천 0 | 조회 122
2024.04.11 0 122
350
[활동 글] [128호]조선소 이 사나운곳에서도
mklabor | 2024.04.11 | 추천 0 | 조회 126
2024.04.11 0 126
349
[활동 글] [128호]죽음의 조선소,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죽어야 하는가
mklabor | 2024.04.11 | 추천 0 | 조회 126
2024.04.11 0 126
348
[현장 보고] [127호]50인(억) 미만 사업장 실태 조사 결과 - 산업안전보건실태 조사와 비교를 중심으로 -
mklabor | 2024.01.18 | 추천 0 | 조회 447
2024.01.18 0 447
347
[건강하게 삽시다] [127호]감기와 독감
mklabor | 2024.01.18 | 추천 0 | 조회 650
2024.01.18 0 650
346
[산재 판례] [127호]사내 동호회 활동, 사외 행사 참여는 산재일까요
mklabor | 2024.01.18 | 추천 0 | 조회 372
2024.01.18 0 372
345
[만나고 싶었습니다] [127호]성평등노동으로 인간답고 평등한 삶을 실현
mklabor | 2024.01.18 | 추천 0 | 조회 376
2024.01.18 0 376
344
[상담실] [127호]물량팀은 산재 승인 어떻게 받나요?
mklabor | 2024.01.18 | 추천 0 | 조회 390
2024.01.18 0 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