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호]같은 사례, 다른 결론

[상담실]
작성자
mklabor
작성일
2023-03-09 14:21
조회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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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욱  바른길 노무사  공인노무사


 

누구나 한 번쯤 ‘찬 데서 자면 입 돌아간다’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실제로 구안와사 또는 벨마비라고도 부르는 안면마비는 찬 바람에 노출된 이후 그 빈도가 증가한다는 역학조사 결과가 있다. 그리고 아직 의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바이러스 감염, 면역력 저하 등이 찬 바람과 함께 안면마비의 주된 발병 원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해서 2018년 근로복지공단은 한강 다리의 안전진단을 위해 영하의 온도에서 4시간 이상 옥외 작업을 했던 노동자의 안면마비를 업무상 질병으로 승인한 바 있다. 그리고 당시 근로복지공단의 결정문에는 “안면마비 증상은 원인 불명인 경우가 많으나 찬 바람이 노출된 이후 그 빈도가 증가하는 역학적 연구 결과도 있으므로 신청 상병과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것이 위원들 다수의 의견”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근 신청한 안면마비 산재 사건은 이와 유사한 사례임에도 2018년과 정반대의 판정을 받았다. 재해자는 미얀마에서 온 이주노동자였고 조선소 협력업체에서 사상작업을 수행했다. 2021년 12월 중순이었던 어느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상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날은 며칠째 영하의 기온을 기록하던 혹한이었다. 그리고 재해자는 이런 혹한의 날씨에 천장만 있고 문은 없어 차디찬 바닷바람이 그대로 통하는 작업장에서 하루 온종일 얼굴에 찬 바람이 들어오는 송기 마스크를 쓴 채, 강제 환기를 위해 틀어놓은 대형 팬 앞에서 작업하다가 결국 안면마비가 왔다. 당연히 산재가 될 줄 알았다. 재해자는 며칠 연속 찬 바람에 노출된 채 작업을 수행한 것 외에도 1주 평균 60시간이 초과할 정도의 노동시간, 주야간 교대, 휴일 부족 등으로 심신이 지쳐있는 상태였고, 이에 재해자의 안면마비는 ‘만성적으로 과중한 업무로 인해 면역력이 저하되어 있던 상태에서 장시간 찬 바람에 노출되어 발병’한 것으로 추단되기에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신청 상병의 발병 원인은 의학적으로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의 가능성이 가장 높으나 재해 당시 신청인이 노출되어 상병을 야기할 만한 유해물질 등이 확인되지 않으며, 신청 상병과 과로와의 인과관계는 현재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는 의학적 소견”이라고 하면서 2018년 사례 때와 달리 불승인 결정을 했다.

언뜻 보면 2018년 사례와 이번 재해자의 사건이 다른 쟁점인 듯 쓰여있지만 사실 두 사례는 같은 기준을 두고 달리 판단되었을 뿐이다. 안면마비라는 질병은 바이러스 감염이 원인이라는 의견이 가장 많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찬 바람에 노출된 이후 발병 빈도가 증가한다는 역학조사도 있고 자가면역질환 즉, 과로 등에 의한 면역력 저하가 원인이라는 의견도 있다. 다시 말해 그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을 뿐 과로로 인한 면역력 저하와 찬 바람 노출 등이 안면마비의 원인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과로와 스트레스, 찬 바람 노출 등을 사유로 안면마비의 업무 관련성이 인정된 사례가 여럿 있다는 점과 의학적으로 명백히 원인이 밝혀져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인과관계를 쉽게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법원의 일관된 판결 취지에 비추어 보면, 지금의 산재보험제도 하에서는 당연히 원인이 명백히 밝혀져 있지 않으니 승인해줄 수 없다는 결정보다는 명백히 원인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그럴만한 개연성이 있으니 승인하겠다는 결정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왜 2018년에 찬 바람 맞고 일하다 안면마비가 온 노동자는 산재 노동자가 되고 2021년에 찬 바람 맞고 일하다 안면마비가 온 노동자는 산재 노동자가 될 수 없는 것이었을까? 이번 사건 주인공은 내국인이 아니라서? 이 사건은 도저히 그 결정을 납득할 수 없어 현재 이의를 제기(심사청구)해 둔 상태다. 부디 심사 결정 시에는 차별없는 결론을 바란다. 그게 아니면 적어도 우리가 객관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사유를 알려주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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