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호]산재노동자가 짊어져야 하는 입증책임의 무게

[상담실]
작성자
mklabor
작성일
2022-11-04 13:51
조회
1693

             김남욱  바른길 노무사  공인노무사


 

오랜 시간에 걸쳐 문제 제기가 되고 있지만 법원은 여전히 업무와 재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증명책임이 업무상의 재해임을 주장하는 노동자에게 있다는 입장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전체 내용과 구조, 입법 취지 등이 그러하다는 것이 법원의 해석이지만 실제 업무상 재해를 당한 노동자에게 떠맡겨지는 증명책임은 꽤나 무겁다. 특히 최근 마주했던 사건들을 되짚어보면, 어떠한 재해가 업무상 재해에 해당함을 증명해내야 하는 책임의 무게는 그들의 고용 안정성과 반-비례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도 들게 한다.

20년 넘게 조선소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두 노동자가 있었다. 편의상 갑과 을이라고 부르면 갑은 원청 사업장 소속, 그러니까 직영 출신이었고 을은 하청 중에서도 일정한 소속 없이 업무량에 따라 일을 좇는 이른바 물량팀 일용직이었다. 두 사람은 퇴직하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시점에, 약 1년 간격으로 ‘간질성 폐질환’이라는 질병에 걸렸다. 갑에게는 석면이, 을에게는 금속분진이 원인이었다.

90년대 초·중반, 어쩌면 그 이후까지도 조선소에서는 석면포와 같이 석면이 포함된 자재를 많이 사용했다. 그리고 이는 이미 세상에 드러나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석면을 특별한 보호구도 없이 상시 사용했던 갑에게 질병과 업무 간 상당인과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갑의 질병은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됐다.

문제는 을이었다.
을은 조선소에서 20년 넘게 그라인딩을 했고, 을의 폐에는 금속분진이 쌓여있음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을은 특별한 소속이 없는 물량팀 일용직이었기 때문에 서류상 근무 경력을 확인할 길이 마땅치 않았다.
당시 조선소 물량팀은 관리자가 아니면 4대 보험에 가입시키지 않는 것이 당연한 듯했기에 20년간의 기록을 뒤져봐도 눈으로 확인되는 근무 경력은 이리저리 긁어모아 고작 1, 2년 남짓이었다. 급여를 받았다는 통장입출금내역을 확인해봐도 대부분 급여 입금자명에는 업체명 대신 일당을 전달해준 물량팀장들의 이름뿐이었고, 그마저도 어떤 회사에서 일하고 받은 일당인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을은 산재 신청 준비를 시작하기 전 이미 수술 후유증과 합병증으로 의식이 없다시피 했고, 산재 신청을 해보기도 전에 사망했다.

이제 을이 20년 넘게 조선소에서 금속 그라인딩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같이 일했던 동료 노동자들을 찾아서 진술을 받아 보여주는 것뿐인 듯하다. 그리고 근로복지공단이 그 진술의 신빙성을 어디까지 인정해주느냐가 업무 관련성을 인정받는 데 큰 관건이 될 것이다. 만약 서류상 확인되는 근무 경력만이 전부인 것으로 간주되면 을의 질병은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어쩐지 내가 다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4대 보험 기록이 없는 건 을의 잘못이 아닌데, 4대 보험 혜택을 못 받아도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 쇳가루가 수명을 갉아 먹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열심히 일한 잘못밖에는 없을 텐데, 같은 기간에 대한 을의 노고는 직영 출신 노동자들의 노고에 비해 결코 적지 않았음에도 눈으로 보여주기가 참 힘들다.

고인이 된 을의 사건은 아직 신청 준비 중이다. 그가 살아생전 인간적으로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지, 다행스럽게도 같이 일했던 동료 노동자들 여럿이 먼저 도와주겠다고 나서주고 있다.
비록 일평생 조선업에 바친 자신의 노고를 서류에 기록으로 남기지는 못하였지만 그 결과로 발병한 질병과 그의 죽음까지 개인적 사유에 의한 것으로 치부되고 끝나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그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 그가 보살피고자 했던 가족들 품으로라도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업무 관련성에 대한 증명책임의 무게가 노동자들의 소속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억울함은 없길 바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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